거창한 목표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나날이다. (현실을 직시한걸까, 나의 실제 능력에 대한 메타인지가 높아진걸까 ㅋㅋㅋ) 그냥 살아있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아름다운지를 배우는 날들이다. 아직 배움이 짧아 공감되는 사례와 근거를 기반으로 주장하기는 어렵지만, 느낌을 남기고 싶어졌다.
일기를 매일 쓰다보면, 기억도, 감상도, 배움도 남지 않는 하루가 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에게 의미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는 강력한 증거다. mindless했다는거지,, 그래서 일기를 보면, 내가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다.
살아있을 때의 깊은 느낌은 유전자에 저장되는 것 같다. 기계적으로 메커니즘을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강렬한 느낌을 언제든지 생생하게 설명할 수 있다. 반대로 죽어있을 때의 느낌은 없다. 느낌이 그냥 없다. 불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고 기계가 된 것 처럼 input, process, output만 기록된다.
크리스토퍼 알렉산더의
감정, 느낌, 아름다움을 경시해왔던 인간으로서 부끄러운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기계적인 메커니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열등하게 여겼던 순간, 부자연스러운 프로세스를 강요하던 순간, 머리로 납득이 되는데 행동하지 않는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던 순간, 원대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하향식 계획을 세우고 자랑스럽게 공유했던 순간, 분명히 완벽한 과정으로 보였는데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까지.
문제에 대한 진단 없이 감정이 삶에서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대신,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니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꿈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매일 살아있는 사람은 행복하고, 여유가 넘친다. 외부의 자극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이 있어도, 금새 회복한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관용이 가득하고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 같다. 내가 꿈꾸는 세상은 이런 세상에 더 가깝다.
기계론적 질서 개념은 1640년경 데카르트로부터 유래되었습니다. 그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무언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고 싶다면, 그것을 ‘기계’라고 가정해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이 관심 있는 대상—굴러가는 공, 떨어지는 사과, 인체 내의 혈류 등—을 완전히 고립시키고, 특정한 규칙을 따르는 기계적 모델, 즉 ‘정신적 장난감’을 하나 만들어 그것이 그 대상의 행동을 재현하도록 하는 방식입니다. 바로 이러한 데카르트적 사고 방식 덕분에 우리는 현대적인 의미에서 사물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고, 오늘날 우리가 종종 잊고 있는 중요한 사실은, 이 과정은 단지 ‘하나의 방법’이라는 점입니다. 사물을 고립시키고, 분해하고, 기계적인 방식으로 작동 모델을 만들어내는 일은 실제 현실 자체가 그런 구조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편리한 정신적 도구일 뿐입니다.
데카르트 자신은 이 과정을 일종의 ‘정신적 속임수’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신앙심 깊은 사람이었고, 20세기에 이르러 사람들이 실제 현실이 진짜로 그런 식으로 되어 있다고 믿게 된 사실을 알았다면 크게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데카르트 이후 그의 아이디어는 점점 힘을 얻었고, 사람들은 실제로 혈류의 작동 원리나 별이 탄생하는 방식을 기계처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7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이 개념을 활용해 세상의 거의 모든 기계적 측면을 밝혀냈습니다.
그러다 20세기에 들어서, 사람들은 새로운 정신 상태로 전환되었습니다. 현실이 마치 정말로 그 기계적 그림—즉 기계처럼 작동하는 구조—인 것처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글에서 나는 이를 ‘20세기 기계론적 세계관’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 20세기적 기계론이 등장한 결과, 예술가들에게는 두 가지 커다란 재앙이 닥쳤습니다. 첫 번째는, “나(I)”가 세계관에서 사라졌다는 점입니다. 세상을 기계로 본 세계관에는 ‘나’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개인이 된다는 것, 한 사람으로서의 내면적 경험은 이 그림 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물론 우리의 실제 경험 속에는 여전히 ‘나’가 존재하지만, 우리가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 갖고 있는 세계관 속에는 그 ‘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창조라는 과정 자체가 ‘나’로부터 시작되는데, ‘나’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 안에서 무언가를 어떻게 창조할 수 있을까요?
‘나’와 개인적 내면의 삶이 세계를 이해하는 자연스러운 일부로 간주되지 않는 세계 속에서 예술가로 존재한다는 것은, 건축이라는 예술이 공허한 진공 속에 놓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설명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두 번째 재앙은, 세상 속에서 ‘가치’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사라졌다는 점입니다. 물리학이 제시하는 세계의 그림은 순전히 ‘정신적 기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 안에는 ‘가치’라는 개념이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치는 이제 단순한 개인적 의견의 문제로 취급되고 있으며, 세계의 본성에 내재된 것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 결과와 함께, ‘질서’라는 개념도 무너져버렸습니다.
기계론적 질서는 우리가 세상 속에서 직관적으로 느끼는 깊은 질서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깊은 질서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 깊은 질서의 진정한 본질은 아주 단순하고 근본적인 질문 하나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진술을 참 또는 거짓이라고 인정하는가?”
이 질문이 바로 데카르트에서 출발한 기계론적 세계관과, 내가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관을 가르는 기준입니다.
데카르트가 시작하고 20세기 과학자들이 대부분 받아들인 세계관 속에서는, 참 또는 거짓일 수 있는 진술은 ‘기계적 메커니즘’에 대한 진술뿐이다라고 여깁니다. 이것이 바로 20세기에 널리 통용된 ‘사실(fact)’의 개념입니다.
하지만 내가 제시하는 세계관에서는, 두 번째 종류의 진술 역시 참 또는 거짓일 수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력의 정도, 조화의 정도, 전체성의 정도에 관한 진술, 즉 가치에 관한 진술입니다. 내가 주장하는 관점에서, 이러한 상대적인 전체성에 대한 진술도 ‘사실’이며, 오히려 그것들이야말로 가장 본질적인 진술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 때문에, 내가 이 책에서 제안하는 질서 개념은 필연적으로 세계관의 전환을 수반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내가 벽에 문을 설치하려고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나는 여러 가지 기계적 사실 진술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은 냉장고가 통과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넓다.
1시간 동안 화재를 견딜 수 있다.
무게가 52킬로그램이다.
어떤 문은 안이 들여다보이고, 어떤 문은 그렇지 않다.
책상의 위치 때문에 소음에 방해받을 수 있다.
이런 것들은 20세기적 의미에서 모두 ‘사실 진술’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실(fact)’이라는 단어를 이해하는 방식은 바로 이렇습니다. 즉, 이런 유형의 진술이 참 또는 거짓일 수 있다고 일반적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내가 문을 벽에 설치하려고 할 때, 또 다른 종류의 진술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이 위치에 있을 때 문이 더 조화롭게 느껴진다.”
“이 위치는 방의 전체성과 더 잘 어울린다.”
“이 문틀이 다른 문틀보다 방의 생명력에 더 잘 맞는다.”
“이 문이 저 문보다 방 안에 더 많은 생명력을 불러온다.”
“연한 노란색 문이 진회색 문보다 더 생기 있어 보인다.”
이러한 진술은 20세기 과학의 규범 속에서는 참/거짓을 판별할 수 있는 진술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단지 ‘의견’일 뿐이라고 여겨지며, 객관적으로 논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우리는 이런 원칙에 익숙해져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매우 기이한 일입니다. 건축가, 장인, 예술가들은 매 순간 상대적인 조화에 대해 판단해야 합니다. 어떤 것이 더 낫고, 어떤 것이 더 조화롭고, 더 많은 생명력을 지녔는지를 매일같이 결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참/거짓으로 여길 수 있는 진술이 오직 기계론적 사실뿐이고, 조화, 아름다움, 좋고 나쁨, 생명력의 많고 적음에 관한 모든 진술이 오로지 개인적이고 임의적인 의견에 불과하다면—우리는 건축에 대해 합리적인 논의를 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가 건축의 발전에 미친 파괴적인 영향은 지난 수십 년간 충분히 논의되지 않았습니다. 가치에 대한 진술이 참/거짓일 수 없다는 전제가 지배하는 세계관 안에서는, 건축가로서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합리적으로 논의하거나, 공감대에 도달할 수 있는 희망 자체가 원천적으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는 모든 판단은 자의적이고 개인적인 것밖에 될 수 없습니다.
The nature of order: The phenomenon of life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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