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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없는 시작

3월의 마지막 주말, 회고를 하고 있었다. 한 달을 돌아보니 당위에 쩔쩔매느라 본질을 짚는 능력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유 없이 눈앞의 일을 쳐내느라,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를 잊고 있었다.

그때 샤워를 하다가 하나의 단어가 떠올랐다. 자립. 맥락 점프처럼 느껴졌지만, 동시에 오랫동안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하나로 모이는 느낌이었다. 저널치료, 학습설계, 교육, 정치, 창업, 스크럼마스터 — 겉으로 보면 뿔뿔이 흩어진 관심사들이, 아주 깊은 곳에서는 하나의 줄기로 이어져 있을 수 있다는 직감.

이 글은 그날 시작된 탐색의 기록이다. 정리된 결론이 아니라, 생각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그대로 남긴다.


원체험: 초등학생 때 나를 살린 것

나는 누군가에게 솔직하게 어려움을 토로하는 걸 어려워한다. 자존심이 굳센 편이기도 하고, 삼남매 중 장녀이기도 해서 부모님과 솔직하게 힘든 이야기를 해본 적이 거의 없다. 주로 혼자 생각하거나 글을 쓰면서 내 문제를 내가 해결해왔다.

얼마 전에 권고사직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그때 나를 좀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못하고, 초등학생 때 혼자 힘듦을 이겨내면서 적었던 것이 있었다. ‘유서 쓰기’ 활동의 결과물. 거기에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내가 무언가를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적혀 있었다.

그걸 본 순간, 예전의 내가 얼마나 안쓰러웠는지. 안아주고 싶었다. 펑펑 울었다. 지금까지 나의 패턴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걸 알게 되고 나서 깨달은 것이 있다. 내가 혼자서 힘들어할 때마다 나를 지탱해주고 살려준 것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일기와 글이었다는 것. 글을 통해 스스로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대단한 일이다. 사람들은 도움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살리는 것에 대해서는 익숙하게 생각하지만, 스스로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은 비교적 덜 생각하는 것 같다.


흩어진 점들

저널치료에 관심을 가지기 전에, 나는 교육이라는 것에 먼저 관심을 가졌다. 내가 누군가를 도와주는 행위에서 기쁨을 느끼는데, 그 방식이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일 때 더 재밌고 좋았다.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는 메타적인 역량을 키우는 교육을 하고 싶었다.

공교육에서 이런 교육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교육 구조를 기술을 가르쳐주는 곳에서 메타 역량을 학습하는 곳으로 바꾸고 싶어서 정치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주제를 가지고 창업을 시도했다가 돈을 벌지 못하고, 사업을 배워야 지속가능하겠다고 생각했다. 스타트업에서 오퍼레이터로 일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 줄타기를 하고, 거짓말을 해야 했고, 많은 걸 배웠지만 나름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러다가 지금 팀에 합류했다. 학습 설계자로 일해보겠냐는 제안을 받고, 내가 교육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비전과 지금 회사의 비전이 일치하기에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그런데 마음 한켠에는 항상 이런 것이 있었다. 저널치료와 학습설계의 교집합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답답함.내 관심사가 뿔뿔이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점들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떤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싶은 욕심이 있고, 그러기 위해 노력하는 힘은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힘이 분산되면서 약해지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최근에 들어서 답답했다.


샤워 중에 떠오른 것

Connected dots. 바로 자립이라는 키워드였다.

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게 행복하고 가치 있다고 느낀 지는 좀 되었다. 2023년을 회고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정말 본질적으로 무엇을 도와주는지는 아직 없는 상태였다. 자기답게 살 수 있도록 돕는 걸 시도해보기도 했고, 이것저것 풀어놓는 방식으로 많이 시도해봤다. 의미 없는 경험은 없었다.

그런데 이제 하나의 strong center를 짚고 넘어갈 시점이 된 것 같았다. 그게 있으면 내가 어디에 집중할지 머릿속에서 직관적인 그림이 그려질 것 같고, 우선순위 판단을 더 명확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의 자립을 돕는 시스템을 설계한다.

이 말로 시작하려 했다. 자립을 돕는다는 것은 저널치료를 통해 스스로를 살리는 행위, 학습을 통해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행위를 포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스템을 설계한다는 말은, 직접 자립을 돕는 것을 넘어 자립이 이루어질 수 있는 시스템을 설계하는 차원이다. 스크럼마스터로 일하면서, 창업을 해보면서, 이 시스템이 제대로 설계되지 않으면 지속가능성이 떨어지고, 생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교집합의 발견

두서없이 풀어놓은 것들을 하나씩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 저널치료와 학습설계가 흩어진 관심사가 아니라 같은 원리로 작동하는 다른 매체라는 것이었다.

저널치료에서 치료자는 내담자에게 답을 주지 않는다. 글이라는 매체를 통해, 사람이 자기 안의 것을 마주하고 의미를 생성할 수 있는 조건을 설계한다.

학습설계에서 설계자는 학습자에게 지식을 넣어주지 않는다. 학습 경험이라는 매체를 통해, 사람이 자기 한계를 만나고 역량을 재구성할 수 있는 조건을 설계한다.

둘 다 “자기 안에서 꺼내는 것을 돕는 설계”였다.

그리고 내 초등학생 때 경험이 바로 원형이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글이라는 도구를 스스로 발견해서 자기를 살린 것. 내가 하려는 건 결국 그 “스스로 발견하는 과정”을 우연에 맡기지 않고 설계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우연히 그걸 발견했지만, 그 우연에 기대야 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느꼈다.


환경이 아니라 시스템

처음에는 “환경을 바꾸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곱씹어보니 환경보다는 시스템에 가까웠다.

환경을 바꾼다는 건 조건을 개선하는 거다. 더 좋은 학교, 더 많은 자원, 더 나은 가정. 그런데 나의 원체험이 증명하는 건 오히려 반대였다. 환경은 바뀌지 않았다. 조건은 그대로였고, 주변 사람이 갑자기 달라지지도 않았다. 그 안에서 글이라는 도구가 작동 구조로서 기능한 것이다.

시스템은 환경이 나빠도 돌아가는 것이다. “조건이 좋아지면 사람이 자립할 수 있다”가 아니라, “조건이 나쁘더라도 자립할 수 있게 하는 구조를 만든다”는 것. 그게 시스템이다.


세 겹의 구조

이 시스템이 어떤 모습인지를 그려보았을 때, 세 개의 겹이 보였다.

첫 번째 겹: 자기를 살리는 힘. 글을 통해, 자기 안의 자원을 발견하고 의미를 생성하는 구조. 저널치료의 영역. 위기가 왔을 때 무너지지 않게 하는 하방 방어.

두 번째 겹: 자기를 키우는 힘. 학습을 통해, 자기 한계를 만나고 역량을 재구성하는 구조. 학습설계의 영역. 현재를 넘어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하는 상방 확장.

세 번째 겹: 서로를 살리고 키우는 힘. 자립한 개인들이 협력을 통해,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복잡성에 대응하는 구조. 커뮤니티의 영역. 하방을 함께 막고, 상방을 함께 뚫는 것.

아무리 내가 학습을 잘 설계한다고 해도, 아무리 저널치료를 통해 회복탄력성을 만들어주는 시스템을 만든다고 해도, 외부의 어떤 변수가 있으면 스스로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 그럴 때에는 인간이 지금껏 해왔던 방식 중 가장 효과적이었던 협력이 필요하다.

이 세 겹을 시뮬레이션해보았다. 하나씩 제거했을 때 어떻게 되는지.

첫 번째 겹(저널치료)이 없으면 — 새벽 3시에 혼자 방에서 무너지는 순간, 아무 도구가 없다. 커뮤니티가 있어도, 도움을 요청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사람에게는 소용이 없다.

두 번째 겹(학습설계)이 없으면 — 살아남되 성장이 비체계적이 된다. 제자리에 머무는 시스템이 될 위험이 있다.

세 번째 겹(커뮤니티)이 없으면 — 개인 차원에서는 완결적이다. 다만 개인의 한계를 넘는 변수가 생기면 무너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결론: 첫 번째와 두 번째 겹은 자립의 필요조건이고, 세 번째 겹은 자립의 지속가능성 조건이다.


안정과 안전

세 번째 겹에 고유한 설계 원리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자기를 살릴 줄 아는 것과 서로를 살릴 줄 아는 것은 같은 역량이 아니니까.

스크럼마스터 시절을 떠올렸다.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자 가진 강점을 최대로 활용하고, 서로를 위해주며 약점은 보완하는 관계. 이것이 작동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 있었던 것은 심리적 안전감이었다. 그리고 나는 특유의 안정감을 통해 사람들에게 안전감을 만들어주는 것을 잘 했다.

반대로 실패했던 순간은 딱 이 안전이 깨졌을 때였다. 조직이 변화하면서 나도 불안해졌고, 사람들을 압박하기 시작하고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협력이 깨졌다.

순서를 다시 보면:

나의 내적 안정이 흔들림 → 타인에게 안전감을 줄 수 없게 됨 → 협력이 무너짐.

이건 시뮬레이션 결과와 정확히 일치했다. 1겹(자기를 살리는 힘)이 흔들리면 3겹(서로를 살리는 힘)이 작동하지 않는다. 내가 사람들에게 안전감을 만들어줄 수 있었던 건, 내 자신이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안정은 오랫동안 글을 통해, 자기 성찰을 통해 쌓아온 1겹의 산물이었다.

여기서 발견한 것: 자기 안의 안정이 타인에게 안전감을 주고, 안전한 관계 안에서 협력이 작동한다. 안정에서 안전으로의 변환. 이것이 세 번째 겹의 고유한 작동 원리다.


뿔뿔이 흩어진 것이 아니었다

여기까지 오니까 커리어 전체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 글쓰기와 저널치료 → 1겹, 자기를 살리는 힘의 원리를 체득한 시간
  • 학습설계 → 2겹, 자기를 키우는 힘의 원리를 체득한 시간
  • 스크럼마스터 → 3겹, 서로를 살리고 키우는 힘의 원리를 체득한 시간

흩어진 게 아니었다. 세 겹을 각각 다른 현장에서 배운 것이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새로운 역량을 쌓는 게 아니라, 이미 가진 세 가지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자립”이라는 말의 한계

그런데 이 전체를 “자립”이라는 단어로 부르기엔 뭔가 부족했다.

자립(自立)의 한자를 뜯어보면 — 自는 코를 본뜬 상형문자에서 “자기 자신”으로 뜻이 확장된 글자이고, 立은 땅 위에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이다. “스스로 서다.” 그런데 “서다”는 정적인 상태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위기 속에서도 다음 방향을 만들어내는 동적인 능력이었다. 그리고 자립에는 “혼자”라는 뉘앙스가 강한데, 내 시스템은 세 번째 겹에서 명시적으로 관계와 협력을 포함한다.

이 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아우타르케이아(autarkeia, αὐτάρκεια)라는 개념을 만났다.

αὐτός(자기) + ἀρκέω(충분하다). “자기에게 충분한 상태.”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이것을 정의하면서 한 말이 결정적이었다.

“자기 충족이란, 혼자 사는 사람에게만 충분한 것이 아니라, 부모·자녀·친구·동료 시민에게도 충분한 것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폴리스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관계를 내장한 자기 충족. 혼자 할 수 있되, 함께하기를 선택하는 상태. 이것은 내가 “꼭 다른 사람의 도움을 전혀 안 받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고”라고 말한 것과 정확히 겹쳤다.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 “현자는 자기 충족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친구 없이도 살 수 있다는 뜻이지, 친구 없이 살고 싶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이었다. 자립보다 autarkeia가 내 세계관의 나침반에 훨씬 가까웠다.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그런데 autarkeia라는 외국어를 그대로 가져다 쓸 수는 없다. 내가 만드는 시스템의 대상은 한국어를 쓰는 사람들이고, 개념의 정확성만큼이나 접근성도 중요하다. autarkeia가 가리키는 의미를 한국어로 새롭게 만들어내는 작업이 남아 있다.

“자기 평화”나 “중용” 같은 말이 떠올랐지만, 아직 적확하지 않다. 중용은 균형의 원리이지 내가 말하는 것은 아니고, “평화”는 고요한 상태를 뜻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평화가 깨진 상황에서도 작동하는 무엇이다.

한 가지 방향이 보인다. 내 세계관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들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 살리다
  • 키우다
  • 생성하다
  • 설계하다
  • 엮다

이 동사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단어를 찾는 것. 명사에서 출발하면 자꾸 정적인 상태로 끌려가는데, 나의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동적이다. “○○하다”의 형태로 먼저 찾고, 거기서 명사를 빼내는 게 순서일 수 있다.


오늘 내가 도달한 곳

정리하면 이렇다.

나는 초등학생 때 누구에게도 기댈 수 있다고 느끼지 못하는 세계 안에서, 글이라는 도구를 스스로 찾아내어 자기를 살렸다. 이 경험이 씨앗이 되어 저널치료와 학습설계라는 두 관심사로 자라났고, 이 둘의 접점을 말로 만들지 못해 답답했다. 그런데 둘은 매체만 다를 뿐 같은 원리로 작동한다 — 답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안의 자원을 발견하고 다룰 수 있는 조건을 까는 것. 내가 하려는 일은 나처럼 우연히 도구를 만나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그 만남이 우연에 기대지 않아도 되도록 구조를 짓는 일이다.

이 구조는 세 겹으로 작동한다. 글을 통해 자기를 살리는 힘, 학습을 통해 자기를 키우는 힘, 그리고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복잡성 앞에서 서로를 살리고 키우는 힘. 앞의 두 겹이 한 사람의 천장을 높이는 구조라면, 세 번째 겹은 바닥이 무너지지 않게 받치는 구조이면서 동시에 함께 천장을 뚫는 구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겹들 사이를 관통하는 원리가 있다 — 자기 안의 안정이 타인에게 안전감을 주고, 안전한 관계 안에서 협력이 작동한다.

이것을 관통하는 말은 “자립”보다 넓고, 아직 한국어로 완성되지 않았다. 그리스어 autarkeia가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고, 최종적인 단어는 동사에서 올라올 것이라고 믿는다. 확정된 한 문장보다 키워드를 들고 매일의 일에서 부딪혀보면서, 단어가 익어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지금의 전략이다.


남은 질문들

이 탐색이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로, 아직 답하지 못한 질문들을 남겨둔다.

  • 글이 나를 살렸지만, 글이 모든 사람을 살리는 건 아니다. 글이 작동하지 않는 조건은 무엇이고, 그때는 무엇이 필요한가?
  • 세 겹 모델에서, 첫 번째 겹(살리기)과 두 번째 겹(키우기)의 경계는 어디인가? 저널치료가 성장의 기능을 할 수도 있고, 학습설계가 생존의 기능을 할 수도 있지 않은가?
  • “자립을 돕는 시스템”의 성공 조건은 그 시스템이 불필요해지는 것이다. 이 패러독스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 교육과 치료는 제도적으로 다른 영역에 속한다. 이 경계를 어떻게 넘나들 것인가?
  • 내가 만드는 구조가 오히려 야생적 발견의 여지를 줄이는 건 아닌가?

이 질문들은 답을 서두르지 않겠다. 초등학생 때의 경험이 십수 년 뒤에야 의미를 드러냈듯이, 오늘의 질문도 시간을 두고 익어갈 것이다. 다만 하나의 렌즈는 가져가려 한다.

매일 하는 일에서 — 과제 하나를 설계할 때, 세션 하나를 다듬을 때 — 이 질문을 던지는 것:

이 설계는 사람이 자기 안의 자원을 발견하는 조건을 깔고 있는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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